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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작품집
ISBN : 9788962282269
지은이 : 염상섭
옮긴이 : 권채린
쪽수 : 154 Pages
판형 : 128*188mm
발행일 : 2009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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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은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로서, 신소설의 뒤를 이어 오늘날의 현대소설의 문법을 개척하고 완성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픽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근대적 인물과 플롯을 창조했으며, 식민지 조선에 대한 냉철한 응시와 통찰을 통해 한국 근대소설의 가능성을 탐색했던 작가였다.
염상섭은 40여 년 동안 17편의 장편소설과 160여 편의 중·단편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러한 방대한 성과물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문학은 몇 가지 특징으로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염상섭 연구가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했던 부분은 이데올로기 면에서의 민족주의와 창작 방법상의 리얼리즘이었다. 국수적 독선에 치우치지 않는, 모든 세대와 계급을 아우르는 힘으로서의 민족주의적 전망과 치밀하고 총체적인 리얼리즘적 소설 기법은 염상섭 문학의 근간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삼대≫, ≪만세전≫과 같은 중·장편소설을 중심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점도 여기서 기인한다.
이에 비해 염상섭의 단편에 대한 접근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실정이다.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단편소설은 민족주의와 리얼리즘 같은 염상섭 소설 세계에 대한 주된 평가에 비추어 볼 때 다소 낯선 작품들이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염상섭 문학이 지닌 다양한 면모를 가늠할 수 있는 유용한 사례가 될 수 있다. <표본실의 청개고리>는 염상섭의 데뷔작이자 초기 단편의 대표작으로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검사국 대합실>과 <임종>은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못한 작품들이다. 세 소설은 주제론적, 인식론적 차원에서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기 힘들 만큼 상이한 경향을 보이지만, 당대 소설적 풍토에선 이례적으로 ‘내면’에 대한 치밀하고 정치한 접근과 묘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00자평
<표본실의 청개고리>는 염상섭의 데뷔작이자 초기 단편의 대표작으로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검사국 대합실>과 <임종>은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못한 작품들이다. 세 소설은 주제론적, 인식론적 차원에서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기 힘들 만큼 상이한 경향을 보이지만, 당대 소설적 풍토에선 이례적으로 ‘내면’에 대한 치밀하고 정치한 접근과 묘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지은이 소개
염상섭(廉想涉, 1897. 8. 30∼1963. 3. 14)은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염규환과 경주 김씨의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서원(瑞原), 본명은 상섭(尙燮), 호는 제월(霽月) 또는 횡보(橫步)다.
1906년까지 조부에게서 한문을 수학하다 11세 되던 1907년 관립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조선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의 서울 환영식에는 전체 학생을 참가시키고 고종 황제의 동적전 거행에는 반 대표만 보낸 것에 항의하여 3학년 겨울에 자퇴하고 보성소학교로 전학을 갔다. 1911년 보성중학에 입학하고 1912년 일본에 유학 가 아자부(麻布)중학, 세이가쿠인(聖學院)중학을 거쳐 1918년 교토(京都)부립 제2중학을 졸업했다. 1918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문과 예과에 입학하였으나 1학기 만에 병으로 자퇴했다.
1919년 오사카에서 3·1운동 소식을 듣고 천왕사공원에서 거사하기로 했으나 피검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어째서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는 글을 써 아사히 신문사로 보냈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과 더불어 귀국해 정치부 기자가 되었다. 2∼4월 <폐허> 동인을 결성하고 7월에 <폐허> 1호를 출간했다. 남궁벽·황석우·김찬영·김억·오상순·민태원과 교류했다. 동아일보 퇴사 후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했으나 이후 줄곧 신문·잡지 편집인으로 생활하면서 소설·평론에 전념했다. 1921년 <폐허> 2호를 간행하고 출세작 <표본실의 청개고리>를 발표했다. <동명>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1922년에는 <개성과 예술>, <지상선을 위하여>을 발표했고, ≪묘지(만세 전)≫를 <신생활> 7∼9월호에 연재했다. 1923년 변영로·오상순·황석우·송진우·최남선·진학문 등과 조선문인회를 결성했다. 1924년 <폐허 이후>를 간행하고, 시대일보 사회부장이 되었다. ≪묘지(만세 전)≫를 재연재·출간했고, 첫 창작집 ≪견우화≫를 냈다. 1926년 <신흥문학을 논하여 박영희군의 소론을 박함>으로 프로문학파에 도전했다. 1927년 <남충서>, <배울 것은 기교-일본문단잡관>, <사랑과 죄>를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1929년 33세의 나이로 김영옥과 결혼했고, 조선일보사 학예부장을 맡았다. 이듬해 조선일보에 ≪삼대≫를 연재하고 매일신보에 <무화과>를 연재했다. 1932년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로 논쟁이 벌어지고 <모델 보복전>을 <동광>에 보냈으나 실리지 않자 조선일보에 <소위 모델 문제>를 발표했다. 1934년 <모란꽃 필 때>, <무현금>을, 이듬해 <청춘항로>를 발표했다. 1936년 매일신보 정치부장, 만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했고, 11월 신의주 학생 사건을 체험했다. 1946년 경향신문 창간 편집국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퇴하고, 성균관대에 출강하며 창작에 전념했다. 1948년 ≪만세 전≫을 개작하여 출간했고, ≪삼대≫를 출간했다. 1949년 중간 노선을 견지한 채 문협에 참가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12월에 이무영·윤백남과 해군에 입대했다. 이듬해 소령으로 임관하여 해군본부 정훈감실에서 편집과장으로 근무했다. 1952년 ≪취우≫를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이듬해 해군 중령으로 제대했다. 1954년 서라벌 예술대학 학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젊은 세대>, <대를 물려서>, ≪일대의 유업≫ 등을 발표했다. 1961년 가톨릭에 입교했고, 이듬해 12월 <횡보 문단 회상기>를 <사상계>에 발표했다. 1963년 67세로 성북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명동 천주교회에서 문단장을 치르고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생전에 서울시 문화상, 자유문학상, 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하고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표본실의 청개고리
검사국 대합실
임종
엮은이에 대해

책 속으로
“네! 그러치 안습니까. 네! …그것도, 바로 읽을 줄이나 알앗스면, 조켓지만, …假令 天地玄黃 하면, 하날 텬- 이러케 읽으니, 一大라 써노코 왜 하날 대 하지 안습니까. 蒼穹(창궁)은 宇宙 間에, 唯一 最大하기 때문에 蒼頡(창힐)이 가튼 偉人이, 一大라고 쓴 것이 아니왜니까. 또 흙 야 할 것을 따-디 하는 것도, 안 될 것이왜다. 따-란 무엇이왜니가. 흙이 아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