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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승세 작품집
ISBN : 9788964063439
지은이 : 천승세
옮긴이 : 고명철
쪽수 : 161 Pages
판형 : 128*188mm
발행일 : 2010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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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여성 작가인 박화성의 아들로 태어난 천승세는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점례와 소>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는 일찍이 그의 스승인 작가 김동리가 “무서운 재능이요 비상한 천재다. 남성적인 산문예술가로서 우리 문단의 유니크한 존재”라고 언급했고, 문학평론가 백낙청도 “그는 토속적 체취를 남달리 건강하게 간직하고 있는 작가다. 그것은 곧 천승세 씨가 우리 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가장 투철하게 의식하고 있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천승세의 작품 대부분은 우리 사회의 최하층 밑바닥 삶을 살고 있는 민중의 애환을 그려 낸다. 그들의 애환은 우리의 역사적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과 밀착된 것으로, 천승세는 그들의 삶의 주름 사이에서 포착되는 삶의 비정함을 그의 탁월한 미적 감각으로 포착한다.
그 대표작 중 하나로 <포대령>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에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은 한국전쟁의 상흔이다. 천승세 스스로 “나는 명색이 50년대 작가”라고 강조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50년대 작가’로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소설적 자의식이 투철하다. 말하자면 그는 ‘50년대 작가’, 즉 전후 작가로서 한국문학사에서 떠맡아야 할 시대적 책무를 회피하지 않는다. <포대령>은 바로 이러한 그의 전후 작가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황구의 비명>은 창작과비평사가 제정한 제2회 만해문학상을 받은 작품으로 천승세의 서사적 윤리 감각을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수작(秀作)이다.
두 작품 <포대령>과 <황구의 비명>에서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민중의 애환과 비극성을 고스란히 짊어진 ‘포대령’과 ‘은주’의 삶을 섬세히 들여다보며, 그들의 상처를 따뜻이 감싸 안는 작중인물 ‘나’의 심미안이다. 우리는 막무가내로 타자와 연대할 수 없다. 타자의 타자성을 제아무리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서로 다른 타자적 존재들은 그 타자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완벽히 소통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지레 실망할 필요는 없다. 타자가 품고 있는, 타자도 미처 모르는, 타자 고유의 미적 가치를 또 다른 타자가 섬세하게 발견할 수 있다면, 타자들 사이에는 심미적 공감이 순간 일어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의 연대감이 싹튼다. 이러한 연대의 감각으로부터 ‘미적 윤리’가 새롭게 발견된다. 천승세의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미적 윤리’에 주목해야 한다.
<혜자의 눈꽃>은 언뜻 천승세의 주류 소설 세계와 이질적인 것으로 읽히지만, 이 소설을 ‘미적 윤리’의 측면에 주목해 읽어 보면, 천승세의 소설이 지닌 독특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폭염>도 ‘미적 윤리’의 측면에서 비슷한 맥락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주요 인물들은 나름대로의 사연 때문에 사회와 자신에 대한 슬픔, 분노 그리고 자괴감으로 뒤엉킨 죄의식을 갖고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슬픔, 분노, 죄의식이 복잡하게 뒤엉킨 우리 사회의 어둠에서 과연 누가 이 모든 것들을 책임질 수 있는가. 이 작품은 1970년대 유신 체제의 정치적 알레고리의 맥락으로 읽을 때, 더한층 구체적 현실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작중인물들은 폭염이 한창인 개펄 곁에서 이러한 삶의 한 단면을 주고받는데, 이것은 달리 말해 유신 체제와 같은 폭압의 시대에 관계가 단절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민중의 암담한 현실을 에둘러 드러낸 셈이다.

요컨대 천승세의 소설 세계는 역사와 생활의 대지에 뿌리내리며 살아야 할 민중의 위엄성과 타자들 사이의 심미적 소통과 공감의 윤리 감각에 기반을 둔 ‘미적 윤리’를 새롭게 발견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민중의 삶의 연대가 갖는 가치를 소중히 다듬는다. 천승세 소설의 매혹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0자평
천승세에 대해서는 일찍이 김동리가 “무서운 재능이요 비상한 천재”라고 언급했고, 백낙청도 “우리 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가장 투철하게 의식하고 있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밑바닥 삶을 살고 있는 민중의 애환을 그려낸다. 천승세는 그들의 삶의 주름 사이에서 포착되는 삶의 비정함을 탁월한 미적 감각으로 드러낸다. 또 민중의 위엄성, 소통과 공감의 ‘미적 윤리’를 새롭게 발견하도록 한다.

지은이 소개
하동(河童) 천승세는 1939년 2월 최초의 여성 소설가라 일컬어지는 소영(素影) 박화성의 아들로, 목포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에는 가라테를 익히며 야전사령관을 꿈꾸는 한편 러시아 문학을 탐독했다.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사를 지원하나 낙방하고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1957년 소설이나 한번 써보자는 생각에, 목포 처녀와 사랑을 나누다 분뇨 구덩이에 빠진 추억을 소재 삼아 8시간 만에 집필한 <점례와 소>로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1961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내일>, <견족>, <운전수>, <예비역>, <사류>, <살모사와 달>, <화당리 솟례> 등의 단편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물꼬>가 당선되며 극작가로 데뷔했으며, 3월 국립극장 장막극 현상 모집에 희곡 <만선>이 당선된다. 이듬해 1월 <만선>으로 한국일보사에서 제정한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을 수상한다.
1969년 한국일보사에 입사, 1972년 퇴사할 때까지 단편 <분홍색>, <그날의 초록>, <돼지네 집 경사>, <종선>, <감루연습>, <빈농>, <주체기>, <누락골 보리풍년> 등을 활발히 발표하며, 제1창작집 ≪감루연습≫(1971)과 제2창작집 ≪독탕행≫(1972)을 출간한다.
1973년 각서까지 쓰며 베링 해로 가는 동태 잡이 원양어선에 승선해 북양 어업 실태를 취재한다. 1974년부터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위원장을 지내며 단편 <삭풍>, <운주동자상>, <폭염>, <황구의 비명> 등을 발표한다. 이듬해 6월 ‘창작과비평사’가 제정한 제2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고, 제3창작집 ≪황구의 비명≫을 출간한다. <황구의 비명>, <포대령>, <낙월도> 등의 작품을 문제 삼는 군부 정권에 의해 고초를 겪었으나 예술의 진정성과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민주화운동 시절을 맞이하고 자유문학운동의 일선에서 작품 생활을 이어간다. 제4창작집 ≪신궁≫(1977), 장편소설 ≪사계의 후조≫, ≪깡돌이의 서울≫, ≪낙과를 줍는 기린≫(1978), 제5창작집 ≪혜자의 눈꽃≫(1979) 등을 출간한다.
1982년 성옥문화상 예술 부문 대상을 수상한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군부 독재에 대한 예술적 항거의 수단으로 본격 소설의 집필을 사실상 중단하고 주로 콩트와 수필을 써서 생계를 유지해 나간다. 1983년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로 취임한다. 1984년 원양어선에 승선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해양 대하소설 ≪빙등≫을 연재하기 시작하고, 콩트집 ≪대중탕의 피카소≫(1983), ≪하느님은 주무시네≫(1986)를 출간한다.
1986년 연재 중이던 ≪빙등≫을 1부만 끝낸 상태에서 정보 당국에 의해 강제로 중단당하는 시대적 수모를 겪는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상임고문으로 지내는 한편, 등단 30주년을 맞아 천승세 대표작선 ≪포대령(砲大領)≫과 ≪이차도 복순전≫을 출간한다.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됨에 따라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직을 맡는다.
1988년 모친 박화성 작가가 85세로 타계한다. 4월에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 갈산리로 이사해 1년 동안 거의 술만 마시며 지낸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직에 중임되고, 성균관대학교 민주동문회 회장직을 맡는다.
1989년 소설집 ≪만월≫을 출간하고, 제1회 자유문학상 본상을 수상한다. 그해 가을 <창작과비평>지에 <축사축란> 외 11편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다시 신인으로 등단한다. 이후 1990년 연재가 중단되었던 ≪빙등≫을 월간 <옵서버>지에 연재하기 시작하고 1991년부터는 갈산리 서재에서 은거하며 잡문 집필, 강연 등으로 세월을 보낸다. 짧은 소설집 ≪소쩍새 울 때만 기다립니다≫(1992), 수필집 ≪하느님 형님 입질 좀 봅시다≫(1993), 중편집 ≪낙월도≫(1993) 등을 출간하고, 시집 ≪몸굿≫ 등을 펴내며 활발한 문학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현재 고향인 목포시 용당동에 위치한 자택에서 ‘죽을 때까지 신인으로 남겠다’는 자세로 여전히 문학의 길을 걷고 있다.

차례
해설 ······················11
지은이에 대해 ··················22

황구(黃狗)의 비명(悲鳴) ·············27
폭염(暴炎) ····················63
포대령(砲大領) ··················91
혜자의 눈꽃 ···················127

엮은이에 대해 ··················150

책 속으로
그해 겨울의 인동(忍冬)은 음울함을 넘어 사뭇 슬프기까지 했었다.
그때 나는 삼동의 추위 속에서 이사를 해야 했을 정도로 삶의 옥죄이는 허기에 탈진되며 눅눅한 가난을 체험해 봤던 것이다. 보증금 없이 월 이천 원 삭월세의 셋방이라는 명목대로, 그해 그 눈 많던 겨울의 내 거처가 돼주었던 다행스러운 판자집은, 우이동의 산자락을 비집는 황량한 공터에 달랑 앉아 있었다.
산언덕 위로는 요란스러운 고급 호텔이 늘펀하게 앉아 있었고 산길을 겸한 좁은 길목이 또아리를 튼 처량한 한길이 나의 판자집을 싸안으면서 산속으로 올라 뻗고 있었다.
담도 없이 한길과 맞트인 마당(마당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손질이 미칠 새 없는 버려진 땅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안으로는 보기 힘든 경색의 노송들이 울울하게 들어서 있었고 그 노송의 숲과 호텔이 앉아 있는 산언덕 발치께로 도봉동 한천으로 흐르고 있을 법한 시린 개울이 가만가만 달리고있었던 거였다. 말하자면, 내 삭월셋방의 마당 구실을 하고 있는 그 노송 밭은 그 어느 땐가는 청청한 심곡 속이었을 것이나 개울이 패이면서 덩달아 한길 쪽으로 밀려난 허진 풍치로 가늠해야 옳을 것이었다.
훈기 하나 없는 방에서 인동의 눌눌한 잠을 보채이다가 선뜩해서 깨어나면, 노송들은 가지가 휘는 겨운 설화들을 얹고 있었고, 그 설화들의 밀밀한 틈새에서 다시 태어나는 눈부신 햇살들이 스물대는 솔잎 그늘을 올올이 적시며 눈밭에와 닿아 있곤 했다.
나는 이 노송 밭의 설화들과 시리디 시린 아침 햇살에 취해 가슴 저리는 가난도 잊고 있었다. 이런 경치에다가 굳이 하나를 더 보탠다면, 나의 판자집 뒷 봉창께로 바짝 잇대어 뻗는 산길도 무척 좋았다.

<혜자의 눈꽃>, ≪천승세 단편집≫ 129~1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