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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문집
ISBN : 9788966802296
지은이 : 조식
옮긴이 : 오이환
쪽수 : 194 Pages
판형 : 128*188mm
발행일 : 2012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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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조식은 16세기 당시 경상좌도의 이황과 나란히 경상우도를 대표하던 유학자로서 양측이 다 우수한 문인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개중에는 두 문하에 모두 출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려 시대에 성리학이 전래된 이래 그것의 도입과 전개를 주도한 학자들이 영남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당시 영남의 좌·우도를 대표한 이들은 동시에 조선 유학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특히 경상우도는 김종직·김굉필·정여창 등 영남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사림파의 실천적 학문 전통 가운데서 성장한 조식은 개인적으로 사림파의 인물들과 밀접한 인적 관계로 맺어져 있었으며, 그 집안의 학문적 배경도 사림파에 속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평생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는 중국 송대의 학자들에 의해 이미 완성되었고, 남은 문제는 오로지 실천이라고 하는 원·명대로부터 조선 전기로 이어지는 유학의 학문적 입장을 강조했다.
조식은 또한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 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성호 이익 같은 이는 그에 대해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東方氣節之最)”이라는 찬사를 부여했고, 또한 퇴계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그 특징으로 간주했다. 이는 대체로 조식 및 남명학파에 대한 공통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조식의 역대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출처(出處), 즉 벼슬에 나아갈 때와 나아가지 말아야 할 시기에 대한 명철한 판단 여부가 그 기준을 이루었다. 그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출처는 군자의 큰 절개”라 해 이를 매우 강조했고, 그 자신은 한평생 열 차례 이상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취임한 적이 없었다.
≪남명집≫은 정인홍의 주도로 선조 35년(1602, 임인년) 합천 해인사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는데, 이 초간본은 별로 보급되지 못한 채 장판각의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으며, 갑진본은 초간본을 바탕으로 새로 간행한 것으로, 이 둘은 모두 3권 2책의 분량으로 되어 있었다. 조식의 문집 분량이 이처럼 적은 것은 자신의 저술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경계했던 학문적 입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죽은 후 남은 원고가 임진왜란의 와중에 대부분 소실되었고, 후일 문집에 수록된 것은 후학들의 기억 속에 남아 전해 온 것이거나 각처에서 수집한 자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갑진본 계통의 각 판본에서 계속적인 작품의 추가와 교정이 가해지고, 불완전한 작품이나 타인의 작품이 잘못 끼어든 사례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남명집≫의 주요 판본들은 대부분 영인 출판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그것들 중에서도 원전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했으면서도 작품들이 가장 포괄적으로 망라된 이정합집본(釐正合集本)을 저본으로 삼았다. 물론 이정합집본 가운데서도 인조반정 이전에 간행된 판본과 다른 점이 있을 경우에는 변화된 부분에 유의해 원형에 가까운 것이 되도록 했다.
이번 번역에 있어서 기존의 번역본들 가운데서는 남명학연구소의 수정판을 참조했으나, 필자의 의견과 다른 부분은 대폭 바꾸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양자를 대조해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필자로서는 이리하여 ≪남명집≫의 번역이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작품 선정에 있어서는 조식의 글들 가운데서도 여러 작품 형식을 안배하는 동시에 자주 언급되는 작품은 대부분 포괄할 수 있도록 유의했고, 그중에서도 조식의 핵심적 사상을 담은 부분은 빠짐없이 수록되도록 배려했다. 그러므로 이 번역본을 통해서도 조식 사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무리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200자평
16세기 사림의 태두 남명 조식. 그의 글에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중시하는 그의 유학사상과 의(義)를 중시하는 선비정신, 당시 유학자들의 계보를 알 수 있는 그의 교우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결벽하면서도 정이 깊은 그의 인간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남명학의 전문가 오이환 교수가 조식의 핵심적 사상이 담긴 작품을 고르고 기존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지은이 소개
조식(曺植, 1501~1572)의 자는 건중(楗仲)이며, 경상도 삼가현 사람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자제가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했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해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유일(遺逸)로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 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 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했다.

옮긴이 소개
오이환(吳二煥)은 1949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타이완대학, 교토대학에서 철학 및 중국 철학사를 전공했고, 교토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대 초부터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에 재직해 왔다. 저서로는 ≪남명학파 연구≫, ≪동아시아의 사상≫, 편저로는 ≪한국의 사상가 10인-남명 조식≫, ≪남명집 4종≫, 역서로는 가노 나오키의 ≪중국철학사≫가 있다.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제1회 학술대상을 수상했다.

차례
시 詩
칼자루에 적어 장원한 조원에게 줌 書劍柄贈趙狀元瑗···3
우연히 읊음 偶吟··················4
산해정에서 주경유에 차운해 在山海亭次周景游韻····5
구암사에 부침 題龜巖寺···············6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부침 題德山溪亭柱······7
삼족당이 유언으로 해마다 보내 주라 한 쌀을 사양함 辭三足堂遺命歲遣之粟·············8
제목 없이 無題··················10
느낀 바 있어 有感·················11
명경대 明鏡臺··················12
덕산에서 우연히 읊다 德山偶吟···········13
멋대로 짓다 謾成·················14
냇물에 목욕하며 浴川···············15
덕산에 집터 잡아 德山卜居·············16
아들을 잃고 喪子·················17
서쪽 집 늙은이에게 寄西舍翁············18
배를 노래함 詠梨·················19
산해정에서 대학팔조가 뒤에 적어 정인홍 군에게 줌 在山海亭書大學八條歌後贈鄭君仁弘·······20
동짓달에 읊다 地雷吟···············21
제목 없이 無題··················22

부 賦
발원 샘의 노래 原泉賦···············25
백성이 바위라네 民巖賦··············31

명 銘
좌우명 座右銘···················41
검에 새김 佩劍銘·················42
혁대에 새김 革帶銘················43
신명의 집 神明舍銘················45
말을 삼가라 愼言銘················47
쇠로 만든 사람 金人銘···············49

편지 書
퇴계에게 답함 答退溪書··············53
퇴계에게 與退溪書·················55
전주 부윤에게 與全州府尹書·············56
이원길 재상에게 답함 答李相國原吉書········58
청도 원님께 與淸道倅書···············60
오 어사에게 與吳御史書···············62
자강·자정에게 與子强子精書············67
다시 又·····················72
성청송에게 답함 答成聽松書·············74
오자강에게 與吳子强書···············76
성대곡에게 與成大谷書···············77
인백에게 답함 答仁伯書··············79
김숙부 진사에게 사례함 奉謝金進士肅夫·······81
다시 又·····················83
송파자에게 보임 示松坡子·············84

기문 記
누추한 동네 陋巷記················89

발문 跋
한훤당의 그림 병풍 寒喧堂畵屛跋··········95
규암이 보내 준 ≪대학≫ 책 꺼풀 안에다 씀 書圭庵所贈大學冊衣下·················99
이 군(이 보내 준 ≪심경≫ 뒤에 적음 題李君所贈心經後102
성중려가 보내 준 ≪동국사략≫ 뒤에 적음 題成中慮所贈東國史略後················104

비문 墓誌
중훈대부 시강원 보덕 증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조 공 묘명−서문과 아울러 中訓大夫侍講院輔德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趙公墓銘 幷序··················107
돌아가신 아버지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 묘갈명−서문과 아울러 先考通訓大夫承文院判校墓碣銘 幷序········111
선무랑 호조좌랑 김 공 묘갈−서문과 아울러 宣務郞戶曹佐郞金公墓碣 幷序·············115
처사 신 군 묘표 處士申君墓表············119
군자감 판관 이 군 묘갈−서문과 아울러 軍資監判官李君墓碣 幷序·················122

상소 疏
을묘년 사직 소 乙卯辭職疏·············127
정묘년에 사직해 승정원에 올린 글 丁卯辭職呈承政院狀···134
무진년에 봉해 올린 소 戊辰封事·········137

논 論
엄광을 논함 嚴光論················149

잡저 雜著
≪관서문답≫을 해명함 解關西問答·········155
대책의 문제 策問題················160
두류산 유람록 遊頭流錄··············163
≪경현록≫의 뒤에 씀 書景賢錄後·········171

해설······················175
지은이에 대해··················181
옮긴이에 대해··················182

책 속으로
●불구덩이에서 새하얀 칼 뽑아내니,
서릿발이 달 속 궁전에 부딪쳐 흐르도다.
견우·북두 넓디넓은 터에
정신이 놀지 칼날은 놀지 않는다.

●마음이 일에 응할 때
온갖 감정 요동치지만,
배움으로 근본 삼으면
감정이 흔들 수 없다.
어지럽힐 수 있다면 근본이 없기 때문이며
흔들 수 있다면 쓰임이 그치나니,
경으로써 근원을 함양해
하늘 법에 뿌리를 두라.

●근왕병을 불러 모으고 나랏일을 정돈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정령이나 형벌에 있지 않고 오로지 전하의 한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사방 한 치의 심장 속에서 말이 땀 흘리며 달리듯 노력해 만 마리 소가 갈아야 할 너른 땅에서 공을 거두는 법이니, 그 기틀은 자기에게 있을 따름입니다. 다만 전하께서 종사하시는 것이 어떤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 쏘고 말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무엇을 좋아하시는지에 존망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취한다는 것은 손으로써가 아니라 몸으로써 하는 법이니, 몸이 닦이지 않으면 자기에게 분별력이 없어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하므로, 쓰고 버림이 모두 그릇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을 쓰지 못한다면 누구와 더불어 훌륭한 다스림을 이루겠습니까! 예전에 남의 나라를 잘 염탐하던 사람은 그 나라의 세력이 강한지 약한지를 보지 않고 사람 잘 쓰는지 못 쓰는지를 보았습니다. 이로써 천하의 일이 극히 어지럽고 극히 잘 다스려짐은 모두가 사람이 하는 짓이지 다른 데서 말미암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을 닦음은 나아가 다스림의 근본이요, 어진 이를 등용함은 다스리는 근본이며, 몸을 닦음은 또한 사람 취하는 근본도 되는 것입니다.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어찌 이 자신을 닦고 사람을 쓴다는 것 바깥으로 벗어남이 있겠습니까? 합당한 사람을 쓰지 않으면, 군자는 들에 있고 소인이 나라를 제멋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