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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구 평론선집
ISBN : 9791130457741
지은이 : 이헌구
옮긴이 :
쪽수 : 386 Pages
판형 : 128*188mm
발행일 : 2015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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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한국평론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평론을 대표하는 주요 평론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국민문학파의 민족문학과 카프의 계급문학으로 양분되어 있던 1920년대 조선 문단에 당당하게 등장한 ‘해외문학파’, 그 중심에 비평가 이헌구가 있었다.
해외문학파는 1926년 동경에서 외국문학연구회가 결성되고 이듬해 1월에 ≪해외문학≫이 창간되면서 활동의 근거지가 마련되자 문단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특히 이헌구는 1932년 1월 ≪조선일보≫에 <해외 문학과 조선에 있어서 해외 문학인의 임무와 장래>(<외국 문학과 조선 문단>로 개제)를 발표해 임화 등 카프 문인과 ‘해외문학파 논쟁’으로 설전을 벌이며 비평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카프 문인은 ‘해외문학파’를 한낱 외국 문학을 기계적으로 소개하는 중개상 노릇이나 하는 반동적 부르주아에 불과하고 더욱이 어떤 주의나 사상도 없는 조직이라고 비난했지만, 정작 ‘해외문학파’가 내건 명분과 사상은 국수주의에 빠진 국민문학과 서구주의에 편향된 카프문학을 모두 비판하며 민족문학의 주체성과 세계화를 도모하는 길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헌구는 당대에 이미 ‘해외문학파’의 이론적 대변자로 활약했지만, 이후 문학사적 평가에서도 ‘해외문학파’의 유일한 이론가로 이름을 남겼다. 여기서 우리는 ‘해외문학파’의 대변인으로서의 이헌구와 독자적인 비평가로서의 이헌구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즉 이헌구는 ‘해외문학파’의 사명과 이념을 공유하면서도 남다른 비평적 입장을 견지하며 차별화되는 면모를 보여 주었다. 문학예술의 사회적 성격과 역할에 두드러진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그는 외국 문학작품을 수용하여 읽고 감상할 때 독자가 생활하는 현실과의 관련성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문학예술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면서 근본적으로는 민족문학 건설의 주체적 태도를 견지하기 위함이었다.
외국 문학 연구자로서 이헌구는 외국 문학에 대한 지식과 그 번역이 민족문학의 토양을 두텁게 하는 교양이 된다고 여겼다. 교양주의자로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교양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행동주의를 표방했다. 문학의 사회적 책무는 교양으로서의 지식이나 번역의 수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 행동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다. 이헌구가 외국문학연구회를 비롯하여 영천소년회, 아동예술연구회, 백광회, 색동회, 신흥과학연구회, 극예술연구회 등 수많은 회합을 조직하고, 세계아동미술전람회나 연극 공연을 기획하는 등 대중적 문화운동에 열성적으로 뛰어든 것은 바로 ‘행동하는 교양’을 몸소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200자평
카프에 맞서 해외문학파의 입장을 대변하던 논객 이헌구의 대표 평론을 엮었다. 이헌구는 국수주의에 빠진 국민문학과 서구주의에 편향된 카프문학을 비판하며 민족문학의 주체성과 세계화를 도모하는 길을 제시했다.

지은이 소개
소천(宵泉) 이헌구는 1905년 5월 12일(음력 4월 7일) 함경북도 경성군 동면 양견동에서 태어났다. 고려 후기의 문신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20대손으로 외동아들이기도 했다.
1916년 아버지가 재직하는 광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독학으로 중동학교에 입학한다. 뒤처진 학업 과정을 따라잡아 반년 만에 과정을 마치고 같은 해 보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다. 그러나 이듬해 장티푸스에 걸려 요양을 위해 귀향하는데,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설 학원인 양견의숙(良見義塾)에서 한 달 정도 교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3년 3월 상경하여 학업을 재개하는데, 이때 ≪동아일보≫ 현상 공모에 동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등단 후 문단 활동을 펼치기보다는 서클이나 연구회를 조직하는 등 실천적인 문화운동에 주력했다. 사실 그는 이미 1922년 고향에서 17세 이하의 소년들로 구성된 ‘영천소년회(英泉少年會)’를 조직하여 아동 운동에 힘을 쏟으면서 문화운동가로서 조숙한 능력을 발휘했다. 1925년 도일하여 와세다 대학 문과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대학 내 ‘아동예술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28년 유학 중 김진섭, 이하윤, 정인섭 등과 함께 조직한 ‘외국문학연구회’는 훗날 그를 ‘해외문학파’로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 이외에도 그는 1927년 김진섭, 이하윤, 정인섭 등과 함께 ‘백광회’를 조직하고, 정인섭과 함께 동요·동극 단체 ‘녹양회’를 결성하고, 함대훈, 이홍종, 이동석과 어울려 ‘신흥과학연구회’ 등을 만들며 열성적으로 문화운동을 주도한다.
1928년 와세다 대학 학부에 진학하여 불문학을 전공한다. 1931년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을 다룬 <사회학적 예술비평>을 졸업 논문으로 제출한다. 같은 해 귀국하여 ≪동아일보≫에 발표한 <사회학적 예술비평의 발전>은 논문의 서론을 수정한 것인데, 이 글이 본격적인 비평 활동의 출발점이 된다. 이헌구의 초기 비평은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천착하며 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본격적인 비평 활동과 병행하여 이헌구는 여전히 각종 단체를 조직하는 활동을 벌이는데, 대표적인 예가 1931년 서항석, 유치진, 이하윤 등과 함께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최초의 연극 전문지 ≪극예술≫을 창간한 것이다.
일제 말기 이헌구는 창씨개명[창씨명은 나키야마 노키쿠(牧山軒求)]을 하고 태평양전쟁을 찬양하고 전시 동원을 독려하는 몇 건의 친일 문건을 발표한다. 이 시기 생계를 위해 화랑을 개업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중앙문화협회, 전조선문필가협회,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등에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며 문학의 단체 활동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민주일보≫, ≪민중일보≫ 등 해방 공간에 설립된 주요 언론사의 편집인, 편집국장 등을 맡기도 했다. 해방된 그해에는 ≪해방기념시집≫을 간행하고 서문을 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헌구는 반공주의에 기초한 구국 운동을 주장하는 논설을 발표한다. 남한 문단에서 그의 정치적·문화적 입장은 자유에 대한 옹호로 표명되는데, 이는 그의 주요 비평적 활동 무대가 ≪자유문학≫인 것과 연관된다. 반면 ≪현대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우파 문단과는 교류가 적었고 자연스럽게 평단의 중심과는 멀어졌다. 예전에 쓴 평문들을 모아 1952년에 ≪문화와 자유≫, 1965년에 ≪모색의 도정≫으로 출간하며 비평 활동을 결산했다. 분단 체제가 성립한 이후 그의 문학 활동은 비평보다는 수필 창작에 집중되는데, 이 시기에 발표한 주요 수필들이 ≪미명을 가는 길손≫(1973)과 편저인 ≪정서와 생활≫(1973)에 수록된다.
1954년에 이화여대 문리과 교수로 취임하고, 같은 해 문리과 대학장이 된다. 또한 그해 10월 23일 변영로, 이무영, 주요섭, 김광섭, 모윤숙 등과 공동 발기로 국제펜클럽 한국 본부를 정식 발족하고, 1956년과 1957년에 국제펜클럽 회의에 참석한다. 1960년에 ≪자유문학≫ 편집을 맡고, 1973년에 대한민국 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한다. 1977년 김광섭의 부음 소식에 충격을 받고 병석에 눕게 된 이후 투병 생활을 계속하다 1983년 1월 4일 별세했다. 1988년 이헌구의 비평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차례
社會學的 藝術批評의 發展
外國 文學과 朝鮮 文壇
푸로 文壇의 危機
文學 遺產에 對한 맑스主義者의 見解
≪海外文學≫ 創刊 前後
非常時 世界 文壇의 新動向
앙드레·지이드의 人間的 放浪
朝鮮 演劇 史上의 劇硏의 地位
行動 精神의 探照
蕭條한 一九三五年의 評壇
朝鮮 演劇 運動에 對한 一小論
貧困한 精神 狀態
評壇 一年의 回顧
朝鮮 映畵人에게−素朴한 啓蒙的 數言
國際 文化와의 交流 問題−佛文學·映畵와 朝鮮
大戰이 나흔 文學
文學의 叙事詩 精神
自由의 擁護−自由主義 批判에 對하여
民族文學 精神의 再認識
解放 記念 詩集을 내며
佛蘭西 文化의 近代的 性格
散珠片片−나의 文壇 回顧錄
散珠片片−續·나의 文壇 回顧錄

해설
이헌구는
엮은이 차선일은

책 속으로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特히 關心하며 注意하는 바는 어떠한 態度와 立場에서 過去의 外國 文學(自國의 文學에 있어서도 同一하다)을 鑑賞 批判할 것인가이다. 다만 漠然하게 文學은 人生 生活의 그 어느 反映이라거나 그 어느 階級人의 心理 描寫라는 外部的 感官만을 通해서 볼 것이 아니요, 더 깊이 그 속에 具現된 人間 心理의 緻密한 描寫·呼訴·엑스터시와, 또는 그때 社會 人間의 對外部的(支配階級 또는 被支配階級) 活動 如何를 感受할 수 있는 藝術的 感興의 所持者인 同時 그 自身이 그 作品, 또는 그 思潮를 鑑賞·批評하는 데 있어서 恒常 自己의 生活하는 社會와의 關聯을 忘却하지 않는 人間이어야 할 것이다.
―<外國 文學과 朝鮮 文壇>

經濟的 逼迫에서 生活의 機會를 喪失한 수많은 人間, 即 民衆이 있는 反面에 生活 能力 以上으로 物質的 享有에 專進하려는 現象이 나날이 늘어 가는 傾向이 一部에 擡頭되어 온다. 即 부르조아의 安逸된 物質의 世界에 對하여 賢明하여야 할 인텔리겐차가 그 地位를 轉換시키려는 燥急 속에 苦憫하고 있다.
―<行動 精神의 探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