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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 시전집 2 교유시 1
ISBN : 9791128825224
지은이 : 왕유
옮긴이 : 박삼수
쪽수 : 352 Pages
판형 : 128*188mm
발행일 : 2017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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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당시(唐詩)의 문학적 가치와 고전적 향기는 오늘날에도 불후의 생명력을 발휘하며 전 세계 문학 애호가들을 매료한다. 시불(詩佛) 왕유는 시선(詩仙) 이백, 시성(詩聖) 두보와 함께 당시의 황금기를 이끈 대시인이다.
이백이 풍류 넘치는 삶을 살며 호방한 필치와 낭만적인 서정으로 시운을 만나지 못한 개인적 시름과 울분을 토로했다면, 두보는 우국 우민(憂國憂民)의 충정을 바탕으로 침울하면서도 사실적인 필치로 전란(戰亂)의 고통에 신음하는 사회 민생을 여실히 반영했다. 반면 불교에 심취했던 왕유는 역관역은(亦官亦隱)의 고뇌에 찬 삶을 살며 담박하면서도 고아한 필치로 세속적 번뇌에서 초탈하고 해탈한 정서를 묘사했다. 그 때문에 왕유의 시는 자연의 정취와 불가(佛家)적 선취(禪趣)가 넘치는 것으로 유명하며 이는 속세를 떠난 서정의 극치로 이어진다.
그러나 왕유의 시적 재능은 은일(隱逸)한 서정에만 머물지 않았다. 적극 진취적인 처세를 보인 전기에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정치적 이상을 표출하는가 하면, 현실 사회의 불합리를 풍자하기도 했다. 또한 생애 전반에 걸쳐 창작된 교유시(交遊詩)와 증별시(贈別詩), 그리고 일상생활의 다양한 감정을 담은 작품에서 묻어나는 은근하면서도 온후한 정감은 감탄을 자아낸다.
입신 현달(立身顯達)의 꿈을 품고 열다섯 살에 고향을 떠나 장안으로 가던 왕유는, 굳이 진시황릉을 찾아 애절한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흥망성쇠에 대한 깊은 감개를 토로할 정도로(1208쪽 <진시황릉을 찾아서> 참조) 어려서부터 이미 인생에 대한 통찰이 남달랐다. 그러므로 그는 가정적인 불행에 정치적 실의와 실절(失節)이 이어지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결코 비관하거나 염세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적 생명 가치를 추구하며 정신적 해탈에 이를 수 있었다.
오늘날 치열한 생존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어느 누구도 현실적인 고뇌와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소중한 일상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기는커녕 왕왕 상대적 빈곤과 열등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힘들어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몸소 밭을 갈며 인생의 참뜻을 깨닫고 희열의 노래를 부른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보다는, 고통과 시련의 삶 속에서도 인생에 대한 통찰로 자신을 지켰던 왕유에게서 더욱 매력을 느낀다. 왕유의 시는 분명 고단한 현대인에게 초탈과 해탈의 지혜를 일깨워 줄 것이다.

200자평
왕유 시의 국내 최고 권위자인 박삼수 교수가 20여 년간의 연구를 총정리해 ≪왕유 시전집≫ 완전판으로 엮었다. 당나라 3대 시인의 하나로 시불(詩佛)이라 불리는 왕유의 시 308편 376수를 모두 옮기고 각 시마다 상세한 해제를 추가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2권에는 교유시 중 송별시와 회인시 86편 89수를 실었다.

지은이 소개
시불 왕유(王維, 701∼761)는 시선 이백, 시성 두보와 함께 성당(盛唐) 시단의 3대가로,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고전 문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대시인이다. 왕유의 자(字)는 마힐(摩詰)이고 하동(河東) 포주(蒲州) 사람으로, 상서우승(尙書右丞)을 지낸 적이 있어 흔히 ‘왕 우승(王右丞)’이라 일컬어진다. 당(唐)·무후(武后) 장안(長安) 원년(701)에 태어나 숙종(肅宗) 상원(上元) 2년(761)에 향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일생 동안 무후, 중종(中宗), 예종(睿宗), 현종(玄宗), 숙종 등 다섯 제왕의 시대를 살았다.
왕유는 중소(中小) 관료 집안 출신으로, 유년 시절부터 아주 총명해 아홉 살 때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하며 열다섯 살 때 고향을 떠나 서경(西京) 장안과 동도(東都) 낙양을 오가며 사회 진출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열아홉에 경조부시(京兆府試)에 응시해 해원(解元) 급제했다. 개원 9년 봄, 스물한 살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했고, 곧 태악승(太樂丞)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같은 해 가을, 수하의 예인(藝人)들이 오직 황제를 위해서만 공연할 수 있는 황사자무(黃獅子舞)를 사사로이 공연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濟州)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개원 23년(735) 왕유는 마침내 장구령의 천거로 우습유(右拾遺)를 제수받고 낙양으로 가서 부임했으며, 개원 24년 10월에는 현종을 따라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왕유의 정신적·정치적 지주였던 현상(賢相) 장구령이 간신 이임보(李林甫)의 시기와 모함으로 파면되었고, 이듬해 4월에는 또 형주장사(荊州長史)로 좌천되고 말았다. 왕유는 감찰어사(監察御史)부터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등의 벼슬을 오가다가 개원 29년 봄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했다. 천보(天寶) 원년 좌보궐(左補闕)에 오르며 다시 입경했고 늦어도 천보 3년(744)에는 남전현(藍田縣)의 망천(輞川) 계곡에 별장, 즉 ‘망천장(輞川莊)’을 마련해 역관역은의 후기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천보 15년에 안녹산 반군의 포로가 될 때까지 여가나 휴가 때면 으레 망천 별장으로 돌아와 풍경을 즐기며 유유자적했다. 천보 9년(750) 봄, 50세의 왕유는 모친상을 당해 망천으로 돌아갔고 복상(服喪)하며 2년간 은거했다. 거상(居喪) 기간이 끝난 천보 11년 봄, 다시 입조해 이부낭중(吏部郞中)을 제수받았으며, 같은 해 이부가 문부(文部)로 개편된 후에도 계속 문부낭중을 지냈다. 천보 14년(755)에는 다시 종오품상의 급사중(給事中)으로 옮겼는데, 그해 11월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다.
천보 15년 6월, 안녹산 반군이 동관(潼關)을 함락하고 급기야 서경 장안으로 입성하자 현종(玄宗)은 부랴부랴 수행원을 대동하고 촉(蜀) 땅으로 피난했다. 그러나 왕유는 미처 그 일행을 따르지 못하고 반군의 포로가 되었다. 일부러 환자나 장애인인 것처럼 위장하며 위기를 모면코자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반군은 왕유를 낙양 보리사(菩提寺)로 압송·구금하고 그들의 벼슬을 강요했다. 왕유는 완강히 버티며 응하지 않았지만 대략 9월 이후에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위직(僞職) 급사중 벼슬이 떠맡겨지고 말았다.
지덕 2년(757)에 동·서 양경을 수복한 조정은 같은 해 12월, 그간 반군에게 억류당해 있으며 위직을 맡았던 사람들을 모두 여섯 등급으로 나누어 논죄했다. 왕유는 보리사에 갇혀 있으면서 친구 배적(裴迪)에게 지어 보였던 시 <보리사에 갇혀 있는데 배적이 찾아와…(菩提寺禁裴迪來…)>로 일찍이 숙종을 감동시킨 데다 당시 형부시랑(刑部侍郞)의 높은 벼슬을 하고 있던 동생 왕진이 자신의 관직을 삭탈하는 대신 형의 죄를 감면해 줄 것을 청원해 숙종의 특별 사면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왕유는 망천에서 한거하다가 이듬해 봄에 복관되면서 태자중윤(太子中允)에 문책(問責) 제수되었으며, 다시 얼마 후에는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를 가함받았다. 그리고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와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역임한 뒤 가을에 마침내 급사중에 복직되었고 상원(上元) 원년(760) 여름에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승진했다.
상원 2년 봄, 왕유는 동생 왕진이 외직(外職)인 촉주자사(蜀州刺史)로 나가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책궁천제표(責躬薦弟表)>을 올려 자신의 관직을 삭탈하는 대신 동생의 내직(內職) 귀환을 청원했다. 그러나 왕진이 새로운 내직을 제수받고 귀경하는 도중인 같은 해 7월, 그리운 동생을 만나지도 못한 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역은(亦隱)’의 삶을 살았던 망천장을 개조한 사찰, 청원사(淸源寺) 서쪽에 안장되었다.

옮긴이 소개
박삼수(朴三洙)는 경북 예천 태생으로 경북대학·중국 타이완(臺灣)대학·성균관대학에서 각각 중문학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찍이 미국 메릴랜드대학 동아시아언어학과 방문교수를 거쳤다. 현재 울산대학 중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출판부장을 맡고 있다. 주요 역·저서로는 ≪왕유 시전집≫(개정 증보판), ≪왕유 시선≫(이상 지식을만드는지식), ≪쉽고 바르게 읽는 논어≫, ≪쉽고 바르게 읽는 노자≫(이상 지혜의 바다), ≪논어 읽기≫(논어 해설서, 세창미디어), ≪주역−자연 법칙에서 인생철학까지≫(현암사), ≪당시의 거장 왕유의 시 세계≫, ≪고문진보의 이해와 감상≫, ≪바르게 읽는 논어1≫, ≪맹자의 왕도주의≫(이상 UUP), ≪시불 왕유의 시≫(세계사), ≪사기(史記)≫(공역, 까치), ≪세계의 고전을 읽는다≫(공저, 휴머니스트), ≪논어, 과연 얼마나 바르게 읽고 있는가?≫, ≪쉽고 바르게 읽는 장자≫(이상 근간) 등이 있다.

차례
1. 송별시(送別詩)
과거에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무잠을 송별하며
손이를 송별하며
제주에서 조영을 송별하며
이별의 광경을 바라보며
기수(淇水) 가에서 조선주를 송별하며
촉(蜀) 땅으로 돌아가는 엄 수재를 송별하며
양양으로 돌아가는 맹호연을 송별하며
회남으로 유랑 길 떠나는 사촌 동생 왕번을 송별하며
최흥종을 송별하며
산중의 족형(族兄) 온고 상인께 유별(留別)하며 아우 왕진에게 보이다
‘쌍황곡가’로 송별하며
부모님을 뵈러 밀주로 가는 최삼을 송별하며
영운지에서 사촌 아우를 송별하며
귀임하는 기주 원 장사를 송별하며
자성사에서 감이를 송별하며
봉 태수를 송별하며
강 태수를 송별하며
선성군으로 부임해 가는 우문 태수를 송별하며
계주 형 자사를 송별하며
대주로 출정하는 조 도독을 송별하며 분운(分韻)함에 청(靑) 자 운(韻)을 뽑아 짓다
육 원외를 송별하며
과거에 낙방하고 강동으로 돌아가는 구위를 송별하며
벼슬을 버리고 강동으로 돌아가는 교서랑 기무잠을 송별하며
기무잠을 떠나보내며
산중으로 돌아가는 장인을 송별하며
선성으로 돌아가는 장인을 송별하며
촉 땅으로 유랑 길 떠나는 최흥종을 송별하며
외사촌 동생 최흥종이 종남산으로 가려 할 제 말 위에서 즉흥시를 지어 주며 송별하다
서 낭중을 송별하며
수양 이 태수를 송별하며
부임 길에 오르는 위군 이 태수를 송별하며
일본국으로 돌아가는 비서감 조형을 송별하며
최흥종의 <남쪽으로 돌아가는 형산 원 공을 송별하며>에 화답하다
생질 하수 원외랑을 송별하며
당주로 가는 구위를 송별하며
산속으로 돌아가는 친구를 송별하는 노래·2수
진운군 묘 태수를 송별하며
임회로 돌아가는 고도의 아우 고탐을 송별하며 짓다
상락군으로 부임해 가는 이 태수를 송별하며
안양으로 부임해 가는 웅구를 송별하며
하서로 부임해 가는 장 판관을 송별하며
행군사마가 되어 하서로 부임해 가는 우문삼을 송별하며
위 평사를 송별하며
안서로 부임해 가는 유 사직을 송별하며
평담연 판관을 송별하며
안서로 출사(出使)하는 원이를 송별하며
높은 누대에 올라 여 습유를 송별하며
산중 송별
남전으로 돌아가는 전 소부를 송별하며
동경유수 위척(韋陟)을 송별하며
동생 진(縉)을 떠나보낸 후 청룡사에 올라 멀리 남전산을 바라보며
과주로 부임해 가는 양 장사를 송별하며
강회전운사로 부임해 가는 원 중승을 송별하며
육혼으로 돌아가는 여섯째 외숙을 삼가 송별하며
송별
권이를 송별하며
강주자사의 좌리(佐吏)로 부임해 가는 장 사인을 송별하며 설거의 10운(韻) 20구(句)에 화답하다
최오 태수를 송별하며
강동으로 부임해 가는 이 판관을 송별하며
산중으로 돌아가는 장 도사를 송별하며
손 수재를 송별하며
방성 위 명부를 송별하며
이 원외의 영랑(令郞)을 송별하며
재주 이 사군을 송별하며
남쪽으로 돌아가는 벗을 송별하며
숭산으로 돌아가는 방 존사를 송별하며
침주로 좌천되어 가는 양 소부를 송별하며
성묘하러 촉 땅으로 돌아가는 왕 존사를 송별하며
강동으로 돌아가는 심자복을 송별하며

2. 회인시(懷人詩)
9월 9일 산동의 형제들을 그리며
조자허를 눈물로 추모하며
활주에 이르러 황하 너머로 여양을 바라보며 정우를 그리다
제수(濟水) 가 네 현인의 노래·3수
산중에서 동생들에게 부치다
맹호연을 눈물로 추모하며
은요를 눈물로 추모하며
은요를 장송(葬送)하며
태을산 도관(道觀)의 가생의 거처를 찾아서
오지 않는 저광희를 기다리며
가을밤에 홀로 앉아 외사촌 동생 최흥종을 생각하며
심 거사의 산장에 들러 고인(故人)을 눈물로 추모하며
그리움
겨울밤에 흰 눈을 마주하고 호 거사의 집을 생각하며
눈 내린 날 이읍을 그리며
저 사마를 눈물로 추모하며
최흥종의 초상화

책 속으로
양양으로 돌아가는 맹호연을 송별하며

문을 닫아걸고 더 이상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이 몸은 오랫동안 세상사를 멀리해 왔는데
분명 그것이 상책(上策)이라
그대에게 권하노니, 고향으로 돌아가 한거(閑居)하소서
때로는 농가의 술로 흠뻑 취해 노래 부르고
때로는 즐겁게 웃으며 옛사람의 책을 읽을 것이니
이야말로 평생에 가장 즐거운 일일진대
굳이 사마상여처럼 부(賦)를 지어 바칠 필요가 있을쏘냐?

送孟六歸襄陽
杜門不復出   久與世情疎
以此爲長策   勸君歸舊廬
醉歌田舍酒   笑讀古人書
好是一生事   無勞獻子虛